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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용의 출현 - 한산

by 오라 가라 2023.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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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산: 용의 출현' 포스터
영화 '한산: 용의 출현' 포스터

 

'한산: 용의 출현'은 김한민 감독의 '명량: 회오리 바람'의 차기작으로서 2022년 7월에 개봉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명량 대첩 5년 전에 있었던 한산도대첩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 있는 픽션을 결합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이 작품은 북미, 유럽,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를 포함한 전 세계 90여개 국가에서 동시에 개봉되었습니다.

 

영화 개요

임진왜란은 일본의 전국시대를 끝낸 도요토미 정권의 왜군이  1592년 4월 13일 선조 시대의 조선을 침략하면서 발발했습니다. 조선은 이 전쟁에서 일본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고 여러 전투에서 패배했습니다. 한양의 도성을 잃고 평양으로 거처를 옮겼던 선조 임금은 평양성을 떠나 의주로 향했습니다. 애초에 왜군은 조선을 정복하고 중국과 인도까지 손에 넣기 위한 계획을 세웠지만, 해상로가 차단되어 물자를 보급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 해상로를 차단한 것이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수군이었습니다. 비록 조선은 여전히 수세에 몰려 있었지만, 이순신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마련했습니다.

1592년 8월 14일,  이순신은 한산도 대첩에서 거북선이라는 비밀 무기를 동원하여 바다에서 전투의 흐름을 바꾸었습니다. 또한, 난중일기 등에서 언급된 '학익진'이라는 전법도 사용합니다. 학익진은 육상전에서는 이미 사용되어 온 전술이었지만, 이순신은 이를 처음으로 해상전에 적용하여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한산도 대첩은 한국 수군이 일본 수군을 압도적으로 이긴 역사적인 해전입니다. 한산도 대첩은 살수대첩, 귀주대첩과 함께 한국사 3대 대첩으로 꼽히며, 세계사적으로는 살라미스 해전, 칼레 해전, 트라팔가르 해전과 함께 4대 해전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또한,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흥행 및 배우들의 연기

영화 '한산'은 국내 관객 수만 총726만 명이 넘는 흥행작입니다. 각종 상상력을 자아내는 거북선과 학익진을 시각화하여 보여 주는 장면들은 이 영화의 흥행에 많은 기여를 하였을 것입니다. 사실 해전의 발생 순서는 한산도 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 순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명량, 한산, 노량 순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영화를 촬영할 때도 '명량' 때는 야외에서 많이 하였지만, 한산은 실내에서 촬영하면서 조명 및 CG 기법의 완성도를 더욱 높였습니다. 하지만 '한산'은 무엇보다 배우들의 명연기가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박해일이 이순신 역으로 출연하였습니다. 박해일은 자신만의 절제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역할을 소화해냈습니다. 김한민 감독은 '지장(지혜로운 장수)'의 이미지를 담기 위해 박해일을 캐스팅했다고 합니다. 수군향도 어영담 역으로 안성기가 출연하며, 그는 고문 격으로 이순신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안성기의 존재는 사극에 무게감을 더해줍니다. 원균 역은 손현주가 맡아 겁 많고 무능하고 무책임한 역할을 능숙하게 연기하였습니다. 임준영 역으로는 옥택연이 출연하며, 그는 왜군의 동향을 살피며 정보를 전달하는 정의감에 찬 캐릭터를 보여 줍니다. 이억기 역으로는 공명이 등장하며, 그는 이순신 곁의 충실한 장수로 등장합니다. 나대용 역은 박지환이 연기하며, 거북선의 설계자로서 북선을 전장에서 제외하려는 이순신과의 갈등을 그립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 역은 변요한이 연기하며, 그는 서슬퍼런 질감의 캐릭터로, 이순신에게 온갖 술수로 승리하려는 잔혹하고 냉철한 면을 보여줍니다. 가토 역으로 김성균이 등장하며, 김성균급의 배우가 가토 역으로 출연해 작품의 긴장감과 왜군 장수 간 경쟁을 잘 묘사합니다. 준사 역으로 김성규가 등장하며, 그는 포로로 잡힌 역할에서 반항하고, 변화를 겪으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찾는 과정을 그립니다. 마나베 역은 조재윤이 맡아 그를 행동대장으로 소개하며, 마나베의 차가운 면모를 극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명량해전과 노량해전 요약

명량해전은 1597년 10월 25일 이순신이 이끈 조선 수군 12척이 일본 수군 330척을 상대로 벌인 격전에서 기적적으로 승리를 얻은 대첩이었습니다. 실제로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명량해전의 승리가 천행이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한산대첩 이후 이순신은 모함을 받아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당했습니다. 그를 뒤이어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계속해서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특히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면서 조선은 제해권을 잃었습니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됩니다. 하지만 선조는 수군의 피해가 너무 심각하였기에 수군을 폐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며 선조에게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 죽을 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비록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장계를 올려 수군 폐지를 막아내었습니다.

이후 이순신은 흩어진 병사들을 모으고 전열을 가다듬어 수군을 재건하였고 치밀한 전략과 불굴의 의지로 울돌목에서 엄청난 전투를 치러 결국 승리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이순신은 1597년 9월 28일 회령포에서 전선 10척을 거두었고, 그 후 2척이 더 회수하였습니다. 따라서 이순신이 선조에게 장계를 올리던 시점에는 전선이 12척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추후 1척의 전선이 추가되면서 명량해전에 참전한 전선의 수는 13척으로 보입니다. 왜군의 전선의 전체 규모는 330척에 이르지만, 직접적으로 공격에 참여하는 것은 130척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명량해전에 참여한 전선의 규모는 조선 수군 13척과 일본 수군 130척인데, 조선 수군은 전선을 하나도 잃지 않았지만 일본 수군은 31척이 격침되었던 것입니다.

노량해전은 1598년 12월 16일에 벌어진 조선과 명의 연합군과 일본과 벌인 결전으로서, 이순신 장군의 생애 마지막 전투입니다. 당시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인해 이미 철수 중이었지만, 조명 연합군이 일본군을 끝까지 쫓아가며 벌인 전투입니다. 사실 이 전투는 왜군이 다시는 조선을 넘보지 않도록 최대한의 피해를 주기 위해 벌인 전투로서 이순신은 놀라운 전술적인 지혜를 발휘하여 적군을 상대로 맹활약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서 탄환에 맞고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유언은 그의 영웅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예측된 왜군 함대의 통과를 막기 위해 명 수군에 도움을 요청하고, 자신은 관음포에서 매복하여 일본 수군의 퇴로를 차단했습니다. 12월 15일 일본 수군이 노량으로 향하자, 조선 전선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며, 일본 수군 전선 500척 중에서 겨우 50여 척만 도주했다고 합니다. 물론 조명 연합군 역시 이 해전에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하지만 노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이 굉장한 손실을 입고 퇴각하게 되면서 정유재란의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7년의 긴 전쟁도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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